목차
슬픔의 위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책은 제목부터 위안을 준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알려준다. 나만 힘든 상황을 겪는 게 아니라는 걸 일깨워 준다.
비상시에 구비하는 감기약처럼, 슬픔이 닥칠 걸 대비해 꼭 상비해야 하는 책.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나요?
죽은 이유가 궁금해도 절대로 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이유를 묻지 않는다.
슬픔에 빠진 사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는다.
연락은 문자로 하고, 위로한답시고 전화하거나 찾아가지 않는다.
입증할 수 없는 말 하지 않는다.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이런 말 따위 하지 않는다.
"걱정 마, 다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괜찮아질지 나도 모르는 데 남이 어떻게 알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어떻게 누그러뜨리나요?
슬픔을 토로한다.
아무도 없을 때 슬픔을 말해본다. 카페로 가서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써내려 간다.
다 쓰면 종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혹은 불태워버린다.
나의 슬픔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한다.
아내가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내가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과 하는 일, 골프, 독서 등과 같은 일상 대화는 큰 위안이 된다.
자신의 슬픔을 모르는 사람과 보내는 일상으로 인해 끝없고 고단한 슬픔의 여행에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 수 있다.
책을 읽는다.
책은 말 그대로 매달릴만한 대상이다. 책은 요구하지도 판단하지도 않고, 보조를 맞춰준다.
책을 읽으면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 준다.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건 엄청난 감정 소진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고요한 곳을 찾으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떠올라 더 괴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혼자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은 환경을 찾아야 한다. 카페가 적격이다. 카페는 혼자 있을 수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곳이다.
자연을 만끽한다.
자연은 과장된 슬픔을 약화시켜 우리를 위로해 준다.
자연은 당신, 당신의 삶, 당신의 슬픔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자연 자체와 비교하면 우리는 하찮은 존재이다.
매일의 죽음과 탄생을 경험하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의 슬픔은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이 진정한 위안과 평온함을 준다.
모루를 피한다.
모루는 대장장이가 쇠를 단련할 때 쓰는 도구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모루를 맞는다. 일상 속에서 갑자기 별이 된 사람과 연관되어질 때 끝없는 슬픔에 빠지곤 한다. 불시에 맞는 모루는 피할 수 없지만, 예상되는 모루는 피할 수 있다.
가령, 늘 연말연시에 조부모님과 함께 큰 식탁에 둘러앉아 만찬을 즐겼다면,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그해는 특히나 식탁의 빈자리가 클 것이다. 만찬 형태를 뷔페식으로만 바꿔도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외식을 하는 등의 방식을 취해본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책을 읽을 때의 강렬한 감정이 떠오른다.
누군가 겪고 있을 슬픔, 절대 겪고 싶지 않을 슬픔의 본질을 꿰뚫는 책이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모루(쇠망치)를 맞는다. 일상 속에서 갑자기 별이 된 사람과 연관되어질 때 끝없는 슬픔에 빠지곤 한다. 밤과 이른 새벽에 어느새 모루가 찾아온다.
이 책은 갑자기 찾아올 모루를 피하는 법,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을 위로하는 법,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누그러뜨리는지 알려준다.
누구나 슬픔을 불러일으킨 사건을 겪고 나면 인생의 달력에 경계선이 그어진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후로 나의 인생은, 나의 마음은 180도 달라져있다.
그렇게 그어진 경계선은 쉬이 옅여지지 않는다.
이 책을 접하고 주변에 부고를 접할 때 [슬픔의 위안]을 선물함으로써 그들의 슬픔을 달래고자 했다.
그 어떤 말도, 글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아주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기를.